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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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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츠 할더는 독일 제국의 장군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의 군인이다. 그는 육군 참모총장으로 폴란드 침공 작전을 입안하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수립하는 등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의 군사 작전을 주도했다. 히틀러와의 갈등으로 해임된 후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증언하고, 미국 육군에서 전사학자로 활동하며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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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할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할더 (1938년)
할더 (1938년)
출생일1884년 6월 30일
출생지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뷔르츠부르크
사망일1972년 4월 2일 (87세)
사망지서독 바이에른주 아샤우임키엠가우
배우자|1907년 9월 23일}}
서명
군 경력
소속 국가(1902–1918)
(1918–1933)
(1933–1942)
군종독일 육군
복무 기간1902년–1942년
최종 계급[[파일:Generaloberst (Wehrmacht) 8.svg|25px]] 상급대장 (Colonel-General)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베저위붕 작전
프랑스 공방전
폴란드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태풍 작전
청색 작전
주요 훈장기사 철십자 훈장
직책
직책독일 육군 고위 사령부 참모총장
임기 시작1938년 9월 1일
임기 종료1942년 9월 24일
지도자아돌프 히틀러
발터 폰 브라우히치
이전 참모총장루트비히 베크
다음 참모총장쿠르트 차이츨러

2. 초기 이력

프란츠 할더는 1902년 뮌헨에 주둔한 제2 왕립 바바리안 야전 포병 연대에 입대했다. 전투학교 졸업 후 중위가 되었고, 포병학교와 바바리아 참모대학을 수료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에 바이에른 전쟁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14년에 졸업했다.

2. 1. 가문 및 출생

프란츠 할더는 뷔르츠부르크에서 독일 제국의 장군이었던 막스 할더(Max Halde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00년 이상 바이에른 왕국 군인을 배출한 가문 출신으로, 1912년에 사망한 그의 아버지 막시밀리안의 최종 계급은 바이에른 왕국 육군 소장이었다.[2] 할더는 1902년 뮌헨에 주둔한 제2 왕립 바바리안 야전 포병 연대에 입대했다. 아비투어 합격 후 사관후보생으로 안베르크의 제3 왕립 바이에른 포병 연대 "프린츠 레오폴트"에 배속되었는데, 당시 연대장은 그의 아버지 막시밀리안이었다.[2] 그는 1907년 군인의 딸 게르트루트와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다.[2]

2. 2. 군 경력 초기

프란츠 할더는 1884년 6월 30일 독일 제국 뷔르츠부르크에서 독일 제국의 장군이었던 막스 할더(Max Halder)의 아들로 태어났다. 300년 이상 군인을 배출한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막시밀리안의 최종 계급은 바이에른 왕국 육군 소장이었다. 1902년 뮌헨에 주둔한 제2 왕립 바바리안 야전 포병 연대에 입대하면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연대장은 아버지 막시밀리안이었다. 이후 전투학교를 졸업하고 중위가 되었으며, 포병학교, 바바리아 참모대학을 수료하였다. 1914년 육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1907년에는 군인의 딸 게르트루트와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는 동부 전선서부 전선에서 참모로 종군했다. 1914년 위험한 정찰 임무에 종사하여 전공을 세워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15년 제6 바이에른 보병 사단 병참 부장을 맡았고, 같은 해 대위로 승진했다. 1917년부터 제2군, 이어서 제4군 참모를 역임했다. 종전 후인 1919년, 국방성에서 전술 교관이 되었다. 1922년 소령, 1931년 대령으로 승진했다.

1931년, 국방군으로 전출되어 발터 폰 브라우히치 휘하의 육군 훈련 부서를 포함하여 참모 및 훈련 직책을 맡았다. 1934년 10월 제너럴마요어(Generalmajor) (소장)으로 진급한 후, 뮌헨에서 제7 보병 사단의 사령관으로 근무했다.[1]

1936년 8월, 할더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국방군의 기동 참모부 국장이 되었다. 1937년 10월부터 1938년 2월까지 베를린 육군 참모부에서 훈련 부서의 국장으로 근무했다. 1937년 국방군 기동 훈련 동안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충성스러운 지지자가 되었으며, 이러한 개인적인 접촉은 그가 빠르게 계급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38년 2월 1일, 할더는 포병 대장으로 진급했다. 9월 1일 육군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루트비히 베크 장군의 뒤를 이었다. 할더는 히틀러가 전쟁을 시작할 경우에 계획된 쿠데타를 이끌어 달라는 보수 민족주의 장교들의 요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 할더는 미국 외교관 레이먼드 가이스트와 비공식적으로 상황을 논의하며 육군이 히틀러가 서방과의 전쟁을 시작하려 한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뮌헨 협정의 체결로 인해 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

3.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할더는 보급 장교가 되어 바바리아 제3군단의 사령부에서 일했다. 1915년 대위로 승진하여 참모로 일하기 시작했고, 전쟁 기간 동안 여러 부대의 참모직을 거쳤다.

4. 대전 사이의 기간

1919년부터 1920년까지 할더는 전쟁부 산하 국방군(Reichswehr)의 훈련부에서 일했다. 이후 뮌헨 군관구에서 전술 교관을 맡았다.

1924년 3월, 그는 소령이 되었고, 군관구 참모부의 작전부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계속 승진하여 후방의 참모직과 훈련직과 같은 부문을 맡았다.

1934년 소장으로 진급했고 뮌헨의 제7 보병사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참모역과 작전통으로서 명성이 높았고, 중장으로 승진하여 기동 참모 감독이 되었다. 이후 1937년 중앙의 육군참모본부에서 교육총감이 되었다. 이 당시 나치의 재군비 방침에 따라 독일군은 크게 확장중이었고, 1935년 징병제가 다시 도입되어 할더는 이 자리에서 이를 감독한 것이다.

1936년 8월, 할더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그는 국방군의 기동 참모부 국장이 되었다. 1937년 10월부터 1938년 2월까지 할더는 베를린 육군 참모부에서 훈련 부서의 국장으로 근무했다. 1937년 국방군 기동 훈련 동안 할더는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충성스러운 지지자가 되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접촉은 그가 빠르게 계급을 올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1]

1938년 2월 1일, 그는 포병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9월 1일 육군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주데텐란트 위기 속에서 8월 18일 사임한 루트비히 베크 장군의 뒤를 이었다. 할더는 히틀러가 전쟁을 시작할 경우에 계획된 쿠데타를 이끌어 달라는 보수 민족주의 장교들의 요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 할더는 미국 외교관 레이먼드 가이스트와 비공식적으로 상황을 논의하며 육군이 히틀러가 서방과의 전쟁을 시작하려 한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어쨌든, 전쟁은 독일에게 주데텐란트를 할양하는 뮌헨 협정의 체결로 인해 피할 수 있었다.[1]

5.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봄, 할더는 육군 총참모장으로서 폴란드 침공 작전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할더는 폴란드군이 2~3주면 공세를 끝낼 수 있다고 예상했다.[1]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할더는 SS의 유대인과 폴란드 지도층 절멸 작전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묵인했다.[1]

할더가 아돌프 히틀러의 왼쪽에 서서 다른 4명의 장교들과 함께 지도를 보고 있는 사진
할더 (맨 오른쪽)와 히틀러, 1940년


1939년 말, 프랑스, 네덜란드벨기에와 같은 저지대 국가, 발칸반도로 독일군이 진공할 계획이 세워졌다. 할더는 독일군이 마지노 선으로 방어된 프랑스를 성공적으로 침공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만슈타인이 제의한 아르덴 숲을 돌파하는 제안이 채택되어 프랑스는 패퇴했고 독일은 승리했다.

1940년 7월 19일, 할더는 총참모장으로서 공적에 의해 상급대장으로 승진했고,[1] 참모본부는 1940년 8월부터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소련 침공 계획 (바르바로사 작전)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이후 독일군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12월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 때문에 독일군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1942년 봄, 다시 독일군은 공세를 시작했고, 할더는 히틀러에게 소련군의 병력이 예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보고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하고 소련이 이미 붕괴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할더는 특히 히틀러가 강력히 주장한 코카서스 공격안을 반대했다. 1942년 9월 24일, 결국 히틀러는 자신과 의견이 잘 맞지 않는 할더를 예편시켜 해임했다. 할더가 반대한 코카서스 공격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의 대참패로 이어졌다.[10]

5. 1. 육군 총참모장 취임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았지만, 할더는 이 신정권과 거리를 두었다. 1934년 3월 14일, 소장으로 진급했고, 이듬해 10월 15일 뮌헨의 제7보병사단장에 보임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도 나치의 간섭에 저항했다. 1936년 8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참모 본부 작전국장, 이어서 교육국장이 되었다. 그 직무에서 담당한 군사 훈련에서 총통 아돌프 히틀러와 개인적인 면식을 얻었다. 히틀러의 신임을 얻어 그는 더욱 출세하여, 1938년 2월에 포병 대장으로 진급했다.[1]

같은 해 9월, 루트비히 베크 참모총장이 히틀러에 의한 국방군 지휘 개입에 항의하여 사임했다. 그 후임으로 할더가 임명되었다. 베크를 중심으로 하는 국방군 장교 그룹은, 당시 진행되던 수데텐 위기에 즈음하여, 영국의 개입이 있을 경우 히틀러를 추방할 계획을 세웠으며, 할더도 그 그룹에 가까웠다.[2] 그러나 뮌헨 회담에서 영국이 양보하여 사태가 수습되자, 쿠데타 계획은 시들해졌고, 할더는 이 그룹에서 이탈했다.[3] 이 변심에 대해 할더는 프로이센 군인의 전통적인 규율과 도덕적 의무 사이에서 고뇌했다고 한다.[4] 쿠데타 그룹에서 이탈했지만, 할더는 주머니 속에 권총을 숨기고 히틀러 암살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5][6]

할더 참모총장과 발터 폰 브라우히치 육군 총사령관 (1939년 9월)


할더는 참모총장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의 독일의 침공 작전 수립에 관여했다. 여기에는 폴란드 침공, 서방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등이 포함된다. 1939년 봄, 할더는 육군 총참모장으로서 폴란드 침공작전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할더는 폴란드군은 멍청하기 때문에 2-3주면 공세를 끝낼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할더는 SS의 유대인과 폴란드 지도층 절멸작전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묵인하고 있었다. 1940년, 프랑스에 승리한 직후 상급 대장으로 진급했다.

5. 2. 폴란드 침공

1939년 봄, 할더는 육군 총참모장으로서 폴란드 침공 작전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할더는 폴란드군이 2~3주면 공세를 끝낼 수 있다고 예상했다.[1]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할더는 SS의 유대인과 폴란드 지도층 절멸 작전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묵인했다.[1]

5. 3. 히틀러와의 갈등 및 반대

1938년 9월, 루트비히 베크 참모총장이 히틀러의 국방군 지휘 개입에 항의하여 사임하자, 할더가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1] 베크를 중심으로 한 국방군 장교 그룹은 당시 진행되던 주데텐 위기 때 영국이 개입할 경우 히틀러를 추방할 계획을 세웠으며, 할더도 그 그룹에 가까웠다.[2] 그러나 뮌헨 회담에서 영국이 양보하여 사태가 수습되자 쿠데타 계획은 흐지부지되었고, 할더는 이 그룹에서 이탈했다.[3] 할더는 프로이센 군인의 전통적인 규율과 도덕적 의무 사이에서 고뇌했다고 한다.[4] 쿠데타 그룹에서 이탈했지만, 할더는 주머니 속에 권총을 숨기고 히틀러 암살 기회를 엿보기도 했다.[5][6]

1939년 11월, 할더는 히틀러의 전쟁 확대 방침에 반대하며 발터 폰 브라우히치와 만나 히틀러 정권 전복을 논의했으나, 브라우히치는 이를 거절하였다. 할더는 히틀러의 전쟁 확대가 독일의 몰락을 가져올 것을 알고 있었지만, 히틀러에게 충성 선서를 한 장교들이 히틀러 전복 음모에 가담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1942년, 할더는 히틀러에게 소련군의 병력이 예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보고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하고 소련이 이미 붕괴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할더는 특히 히틀러가 강력히 주장한 코카서스 공격을 반대했다. 1942년 9월 24일, 히틀러는 자신과 의견이 잘 맞지 않는 할더를 예편시켜 해임했다. 할더가 반대한 코카서스 공격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의 대참패로 이어졌다.[10]

5. 4. 총참모장 해임 이후

1939년 11월, 할더는 히틀러가 전쟁을 확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발터 폰 브라우히치와 만나 히틀러 정권 전복을 논의했으나, 브라우히치는 이를 거절하였다.[1] 할더는 히틀러의 전쟁 확대 방침을 반대했고, 이것이 독일의 궁극적인 몰락을 가져올 것을 알고 있었지만, 히틀러에게 충성 선서를 한 장교들은 히틀러를 전복할 음모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 그래서 그는 히틀러를 단독으로 저격할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3][4]

1942년 봄, 할더는 독일 최고 사령부와 함께 소련에 대한 새로운 공세인 "청색 작전"을 계획했다. 이 계획은 코카서스 산맥에 있는 소련 유전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5] 그러나 소련군은 "탄력적 방어"라는 새로운 전략을 채택했고, 독일군은 혼란에 빠져 작전은 실패했다.[6] 이후 할더는 OKH 참모총장에서 쿠르트 차이츨러로 교체되고 총통 예비대로 퇴역했다.[7]

1944년 7월 20일 몇몇 독일 장교에 의해 히틀러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다음날 할더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8] 그는 이 음모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9] 히틀러는 할더가 자신을 제거할 음모를 꾸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수용소에 감금했다.[10] 1945년 1월 31일 할더는 공식적으로 육군에서 해임되어 티롤로 이감되었다.

1945년 5월 4일 미군이 감옥을 접수하여 할더는 석방되었으나, 이후 전쟁포로로서 2년간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할더가 1948년 증언석에 앉아 오른쪽을 바라보는 사진
1948년 고위 지휘관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할더


1945년 5월, 할더는 미군에 체포되어 억류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나치 정권을 도왔다는 혐의로 독일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재판 과정에서 그의 일기가 발견되어 바르바로사 칙령과 코미사르 명령 수립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나 재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역사 부서에서 소련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재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전후 할더는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72년 바이에른에서 사망하였다.

6. 1. 전사학자 활동

1950년대 할더는 미국 육군 전사부(U.S. Army Historical Division)에서 전사학자로 일했다. 이후 독일 연방방위군의 재건 계획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1]

할더는 1950년대 말에 역사 위원회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했고, 미국 국방부(The Pentagon)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바다사자 작전(Operation Sea Lion) 연구를 위해 할더와 함께 일했던 월터 앤설(Walter Ansel) 해군 소장은 그가 미국 해군 연구소(United States Naval Institute)의 준회원이 되도록 추천했다. 1961년 그는 이 업적으로 공로 민간 봉사상(Meritorious Civilian Service Award)을 수상했다. 이 상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대신하여 에드가 C. 돌먼 소장이 수여했다. 이로써 할더는 아돌프 히틀러와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모두 훈장을 받은 유일한 독일인이 되었다. 그는 1939년 히틀러로부터 철십자 기사 훈장(Knight's Cross of the Iron Cross)을 받았다.[11]

1960년대 동안 할더는 역사학자와 일반 대중 모두로부터 질문을 받는 "역사적 아이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11] 1946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 육군 전쟁사 연구부 독일 지부 소장으로 일했다. 현재 일반적인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사 기술은 할더의 영향이 크다. 1961년 미국 육군으로부터 일반 시민에 대한 최고의 훈장인 시민 공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6. 2. '깨끗한 국방군 신화' 전파

할더는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신화는 독일군이 "고귀한 전쟁"을 치렀다는, 나치-소련 전쟁에 대한 허위적이고 신화적인 관점이었다. 이는 독일의 전쟁 범죄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무시한다.[11] 이 신화의 기원은 1945년 11월에 작성되어 뉘른베르크 국제 군사 재판소에 제출된 "장군 각서"였다. 이 각서는 "1920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군"이라는 제목으로, 할더와 전 육군 원수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리히 폰 만슈타인, 그리고 다른 고위 군사 인물들이 공동으로 작성했다. 이 각서는 독일군을 비정치적이고 나치 정권이 저지른 범죄와는 거의 무관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1] 이 각서에 요약된 전략은 나중에 고위 ''국방군'' 지휘관에 대한 고위 지휘관 재판에서 변호를 맡은 한스 라터너가 채택했다.[11] 이 문서는 미국 장군 윌리엄 J. 도노반의 제안으로 작성되었는데, 도노반은 나중에 중앙정보국(CIA)를 설립했으며 소련을 세계 평화에 대한 세계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 도노반은 국제 군사 재판소에서 부검사로 활동했으며, 그와 다른 몇몇 미국 대표들은 재판을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커져가는 냉전에서 미국이 소련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국으로서 독일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믿었다.[11]

냉전이 진행됨에 따라, 미국 육군 역사과의 독일 부서에서 제공하는 군사 정보가 미국인들에게 점점 더 중요해졌다.[11] 할더는 "할더 그룹"으로 알려진 연구 프로그램의 독일 부서를 감독했다.[11] 그의 그룹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상세히 다룬 700명 이상의 독일 작가들이 작성한 2,500개 이상의 주요 역사 원고를 제작했다.[11] 할더는 이 그룹을 사용하여 진실, 반진실, 왜곡, 거짓을 사용하여 전쟁 당시의 역사를 재창조했다.[11]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전 나치 장교들로 구성된 "통제 그룹"을 구성하여 모든 원고를 검토하고, 필요에 따라 저자들에게 내용을 변경하도록 요구했다.[11] 할더 그룹의 부관은 아돌프 호이징거였는데, 그는 독일의 미국 군사 정보 조직인 겔렌 기구에서도 일하고 있었다.[11] 할더는 집필 팀으로부터 "장군"으로 불리기를 기대했으며, 원고를 다룰 때 지휘관처럼 행동했다.[11] 그의 목표는 독일군 인력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에서 그들을 면죄하는 것이었다.[11]

할더는 모든 작가들이 따라야 할 역사 버전을 제시했다. 이 버전은 군대가 히틀러의 희생자였으며 모든 기회에 그에게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작가들은 군대가 수행한 "품위 있는" 형태의 전쟁을 강조하고 SS에게 범죄 작전을 비난해야 했다.[11] 그는 1950년대에 제2차 세계 대전 역사를 연구하는 소수의 역사학자들이 할더와 그의 그룹으로부터 역사적 정보를 얻어야 했기 때문에 특권을 누렸다. 그의 영향력은 신문 편집자와 작가에게까지 미쳤다.[11] 할더의 지시는 지휘 계통을 따라 전달되었고 전 육군 원수 게오르크 폰 퀴힐러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적 관점에서 본 독일의 행동을 기록해야 하며, 이는 우리 군대에 대한 기념이 될 것입니다." "지도부에서 명령한 조치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지 않으며, 누구도 "어떤 방식으로든 기소"되어서는 안 되며, 대신 ''국방군''의 업적이 강조되어야 했다.[11] 군사 역사학자 베른트 베그너는 할더의 작업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러시아 전선에 대한 독일 역사의 기록은 20년 이상, 부분적으로는 오늘날까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범위에서 패배한 자들의 작업이었다."[11] 볼프람 베테는 "역사과의 작업에서, 국방군 지도부가 책임져야 할 대규모 파괴 전쟁의 흔적이 은폐되었다"고 썼다.[11]

할더는 자신과 독일군을 히틀러, 나치즘, 전쟁 범죄로부터 분리하려고 했다. 그는 러시아 작전에 반대했으며 히틀러에게 동부에서의 그의 "모험"에 대해 경고했다고 주장했다.[11] 그는 자신이 만드는 데 도움을 준 바르바로사 칙령이나 그가 지지하고 배포한 코미사르 명령에 대한 언급을 생략했다.[11] 할더는 또한 소련 침공이 방어적인 조치였다고 주장했다.[11]

미국인들은 원고에 수많은 변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미국과 소련 간의 전쟁이 발생할 경우 미국인들이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정보를 포함하고 있었다.[11] 할더는 전 나치 장교들에게 증거를 없애는 방법에 대해 코치했다.[11] 하인츠 구데리안과 같이 그가 코치한 많은 장교들은 변명의 호소력을 넓힌 베스트셀러 자서전을 쓰게 되었다.[11] 할더는 독일 장교단을 재활하려는 목표를 달성했는데, 먼저 미국 군대에서 시작하여 정치 분야, 마지막으로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넓혔다.[11]

1949년 할더는 ''히틀러, 야전사령관(Hitler als Feldherr)''을 저술했으며, 1950년에는 영어로 번역되어 ''지휘관으로서의 히틀러(Hitler as Commander)''로 출판되었다. 이 작품에는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핵심 아이디어가 담겨 있으며, 이후 수많은 역사와 회고록에서 재현되었다. 이 책은 이상화된 지휘관을 묘사한 후 히틀러와 비교한다. 지휘관은 고귀하고 현명하며, 동부에서의 전쟁에 반대하고 어떤 죄책감도 없다. 히틀러만이 저질러진 악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그의 완전한 부도덕성은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지휘관의 도덕적 행동과 대조된다.[11]

할더의 신화 창조는 자신과 독일군을 전쟁 범죄로부터 면죄하는 데만 집중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두 가지 전략적 및 작전적 신화를 만들어냈다. 첫 번째는 히틀러만이 소련 침공 동안의 군사적 실책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신화는 그가 강력하게 옹호한 전격전 캠페인이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독일을 위해 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11] ''동부 전선의 신화(The Myth of the Eastern Front)''를 저술한 역사학자 로널드 스멜서와 에드워드 J. 데이비스는 "프란츠 할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타난 신화와 현실의 극적인 차이를 다른 어떤 고위 독일 장교보다 더 잘 구현한다"고 말했다.[11]

6. 3. 말년



1945년 5월 4일, 할더는 제7군에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지만, 2차 대전히틀러와의 대립, 1938년 쿠데타 계획 참여, 강제 수용소 수감 경력 덕분에 연합군에게 반(反) 히틀러 파 장교로 간주되어 특별 대우를 받았다.[11] 그는 이탈리아의 미군 포로 수용소에서 여름까지 지낸 후, 전쟁 범죄로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었다.

1946년부터 1961년까지 Operational History (German) Section|미국 육군 전쟁사 연구부 독일 지부de의 소장으로 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사(戰史) 기술은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61년, 퇴직하면서 미국 육군으로부터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시민 공로 훈장을 받았다.

1950년대 할더는 미국 육군 전사부(U.S. Army Historical Division)에서 전사학자로 일했으며, 이후 독일 연방방위군 재건 계획에도 참여했다. 1961년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대신하여 에드가 C. 돌먼 소장으로부터 공로 민간 봉사상(Meritorious Civilian Service Award)을 수상했다. 이로써 할더는 아돌프 히틀러와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모두 훈장을 받은 유일한 독일인이 되었다.

1972년 4월 2일, 바이에른 주 아샤우 임 키엠가우(Aschau im Chiemgau)에서 사망하였다.

7. 비판

프란츠 할더는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주도하고 역사 왜곡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보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할더는 독일군이 나치-소련 전쟁에서 "고귀한 전쟁"을 치렀다는 허위 주장을 펼치며, 독일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려 했다. 그는 미국 육군 역사과 독일 부서의 "할더 그룹"을 통해 2,500개 이상의 역사 원고를 제작하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4][5] 이 과정에서 진실, 반진실, 왜곡, 거짓을 섞어 역사를 다시 썼으며, "통제 그룹"을 통해 원고 내용을 검열하고 수정했다.[5]

할더는 군대가 히틀러의 희생자이며, "품위 있는" 전쟁을 수행했고, SS에게 범죄 책임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7] 그는 게오르크 폰 퀴힐러에게 "독일적 관점에서 본 독일의 행동을 기록해야 하며, 이는 우리 군대에 대한 기념이 될 것"이라고 지시하며, ''국방군''의 업적을 강조하고 지도부 비판을 금지했다.[9]

또한, 할더는 자신과 독일군을 히틀러, 나치즘, 전쟁 범죄로부터 분리하려 했다. 그는 바르바로사 칙령이나 코미사르 명령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소련 침공이 방어적 조치였다고 주장했다.[12]

할더는 볼셰비즘을 "국가 사회주의 독일 국민의 치명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러시아 주둔 군대의 행동 지침"을 통해 유대인을 제거 대상으로 명시했다.[1] 마리타 작전 중에는 보안 경찰 및 보안 서비스에 대한 명령을 통해 적을 사보타주,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및 유대인으로 정의했다.[2]

7. 1. '깨끗한 국방군 신화' 주도

할더는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신화는 독일군이 "고귀한 전쟁"을 치렀다는 나치-소련 전쟁에 대한 허위적이고 신화적인 관점이었으며, 독일의 전쟁 범죄를 부인하거나 무시했다.[1] 이 신화는 1945년 11월 뉘른베르크 국제 군사 재판소에 제출된 "장군 각서"에서 기원했다. 할더, 발터 폰 브라우히치, 에리히 폰 만슈타인 등 고위 군 인사들이 공동 작성한 이 각서는 독일군을 비정치적이고 나치 정권의 범죄와 무관한 존재로 묘사했다.[2][3] 이 전략은 고위 지휘관 재판에서 변호를 맡은 한스 라터너가 채택했다. 이 문서는 중앙정보국(CIA) 설립자 윌리엄 J. 도노반의 제안으로 작성되었는데, 그는 소련을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냉전에서 독일을 군사 동맹국으로 확보하려 했다.[3]

냉전이 진행되면서 미국 육군 역사과 독일 부서의 군사 정보가 중요해졌다.[4] 할더는 "할더 그룹"을 감독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2,500개 이상의 역사 원고를 제작했다.[5] 그는 진실, 반진실, 왜곡, 거짓을 사용하여 전쟁 역사를 재창조했다.[1]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전 나치 장교들로 "통제 그룹"을 구성하여 원고를 검토하고 내용을 변경하도록 했다.[6] 할더 그룹의 부관은 아돌프 호이징거였는데, 그는 독일의 미국 군사 정보 조직인 겔렌 기구에서도 일했다.[7] 할더는 독일군이 저지른 잔혹 행위에서 그들을 면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8]

할더는 군대가 히틀러의 희생자이며 그에게 반대했다는 역사 버전을 제시했다. 작가들은 군대의 "품위 있는" 전쟁 수행을 강조하고 SS에게 범죄 작전을 비난해야 했다.[9] 1950년대에 역사학자들은 할더 그룹으로부터 정보를 얻어야 했기에 그는 특권을 누렸고, 그의 영향력은 신문 편집자와 작가에게까지 미쳤다.[10] 게오르크 폰 퀴힐러에 의해 기록된 할더의 지시는 "독일적 관점에서 본 독일의 행동을 기록해야 하며, 이는 우리 군대에 대한 기념이 될 것"이며, "지도부 명령 비판"은 허용되지 않고, ''국방군''의 업적을 강조해야 했다.[11] 군사 역사학자 베른트 베그너는 할더의 작업이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러시아 전선에 대한 독일 역사 기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12] 볼프람 베테는 역사과의 작업에서 국방군 지도부의 대규모 파괴 전쟁 흔적이 은폐되었다고 썼다.

할더는 자신과 독일군을 히틀러, 나치즘, 전쟁 범죄로부터 분리하려 했다. 그는 러시아 작전에 반대했으며 히틀러에게 경고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바르바로사 칙령이나 코미사르 명령에 대한 언급을 생략했다. 할더는 소련 침공이 방어적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미국인들은 원고에 변명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미국과 소련 간의 전쟁 발생 시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정보를 포함하고 있었다.[8] 할더는 전 나치 장교들에게 증거를 없애는 방법을 가르쳤다. 하인츠 구데리안 등 그가 코치한 많은 장교들은 베스트셀러 자서전을 썼다. 할더는 독일 장교단을 재활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여 미국 군대, 정치 분야,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1949년 할더는 ''히틀러, 야전사령관(Hitler als Feldherr)''을 저술, 1950년 영어로 번역되어 ''지휘관으로서의 히틀러(Hitler as Commander)''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핵심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책은 이상화된 지휘관을 묘사하고 히틀러와 비교하며, 지휘관은 고귀하고 현명하며 동부 전쟁에 반대하고 죄책감이 없다고 주장한다. 히틀러만이 악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그의 부도덕성은 지휘관의 도덕적 행동과 대조된다.

할더의 신화 창조는 전쟁 범죄 면죄뿐 아니라 두 가지 전략적, 작전적 신화를 만들었다. 첫째는 히틀러만이 소련 침공의 군사적 실책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가 옹호한 전격전 캠페인이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독일을 승리로 이끌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자 로널드 스멜서와 에드워드 J. 데이비스는 "프란츠 할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타난 신화와 현실의 극적인 차이를 다른 어떤 고위 독일 장교보다 더 잘 구현한다"고 말했다.

7. 2. 역사 왜곡

할더는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독일군이 "고귀한 전쟁"을 치렀다는 나치-소련 전쟁에 대한 허위적이고 신화적인 관점이었으며, 독일의 전쟁 범죄를 부인하거나 무시한다. 이 신화는 1945년 11월 "장군 각서"에서 기원했는데, 할더는 발터 폰 브라우히치, 에리히 폰 만슈타인 등과 함께 독일군을 비정치적이고 나치 범죄와 무관한 존재로 묘사했다.[1][2] 이 전략은 고위 지휘관 재판에서 한스 라터너가 채택했다.[1]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 육군 역사과 독일 부서에서 할더가 감독하는 "할더 그룹"의 군사 정보가 중요해졌다.[3] 이 그룹은 700명 이상의 독일 작가들이 작성한 2,500개 이상의 역사 원고를 제작했다.[4] 할더는 이 그룹을 통해 진실, 반진실, 왜곡, 거짓을 섞어 전쟁 역사를 다시 썼다. 그는 "통제 그룹"을 구성하여 모든 원고를 검토하고 내용을 변경하도록 했다.[5] 할더의 목표는 독일군이 저지른 잔혹 행위로부터 그들을 면죄하는 것이었다.[6]

할더는 군대가 히틀러의 희생자이며, "품위 있는" 전쟁을 수행했고, SS에게 범죄 책임을 돌려야 한다는 역사 버전을 제시했다.[7] 그는 1950년대 제2차 세계 대전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신문 편집자, 작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8] 게오르크 폰 퀴힐러는 할더의 지시를 기록했는데, "독일적 관점에서 본 독일의 행동을 기록해야 하며, 이는 우리 군대에 대한 기념이 될 것"이며, "지도부에서 명령한 조치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지 않고, ''국방군''의 업적을 강조해야 했다고 밝혔다.[9] 군사 역사학자 베른트 베그너는 할더의 작업이 "패배한 자들의 작업"이라고 평가했고,[10] 볼프람 베테는 ''국방군'' 지도부의 대규모 파괴 전쟁 흔적이 은폐되었다고 지적했다.[11]

할더는 자신과 독일군을 히틀러, 나치즘, 전쟁 범죄로부터 분리하고자 했다. 그는 러시아 작전에 반대했고 히틀러에게 경고했다고 주장했지만, 자신이 만든 바르바로사 칙령이나 코미사르 명령에 대한 언급은 생략했다.[12] 또한 소련 침공이 방어적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미국인들은 원고에 변명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미소 전쟁 발발 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6] 할더는 전 나치 장교들에게 증거를 없애는 방법을 가르쳤고, 그가 코치한 하인츠 구데리안 등은 베스트셀러 자서전을 썼다.[5] 할더는 독일 장교단을 재활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여 미국 군대, 정치 분야, 그리고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1949년 할더는 ''히틀러, 야전사령관(Hitler als Feldherr)''을 저술, 1950년 영어로 번역 출판했다. 이 책은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핵심 아이디어를 담고 있으며, 이상적인 지휘관과 히틀러를 비교하며 히틀러만이 악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할더의 신화 창조는 전쟁 범죄 면죄뿐 아니라, 히틀러만이 군사적 실책에 책임이 있고, 자신이 옹호한 전격전이 승리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전략적, 작전적 신화를 만들었다. 역사학자 로널드 스멜서와 에드워드 J. 데이비스는 할더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신화와 현실의 차이를 가장 잘 구현한다고 평가했다.

7. 3. 반유대주의

할더는 볼셰비즘을 "국가 사회주의 독일 국민의 치명적인 적"으로 묘사하고 독일군에게 "강력하게 진압"하고 "모든 저항을 제거"할 것을 촉구하는 "러시아 주둔 군대의 행동 지침"을 작성했다. 이 명령에는 유대인이 언급되었으며 제거 대상에 포함되었다.[1] 할더는 또한 마리타 작전 중 보안 경찰 및 보안 서비스에 대한 명령을 작성하여 적을 사보타주,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및 유대인으로 정의했다.[2] 할더가 작성한 "범죄 명령"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및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그의 연대성을 보여준다. 에리히 홒프너, 에리히 폰 만슈타인, 발터 폰 라이헤나우를 포함한 할더 휘하의 사령관들은 반유대주의 연설과 명령을 내렸다.[1]

참조

[1] 문서 クノップ(2008年)
[2] 문서 クノップ(2008年)
[3] 문서 ロジャー(2007年)
[4] 문서 ロジャー(2007年)
[5] 문서 ロジャー(2007年)
[6] 문서 ベルトルト(1985年)
[7] 문서 Clark (1965)
[8] 문서 Clark (1965)
[9] 문서 Clark (1965)
[10] 문서 McCarthy & Syron (2002)
[11] 문서 クノップ(2008年)
[12] 아시아역사자료센터 独国総統幕僚全権公使「ワルター、ヘーベル」外二十二名叙勲ノ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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